이스라엘-팔레스타린 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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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은 20세기 초 제국의 붕괴, 전쟁기 외교 약속, 식민 통치, 민족주의의 충돌이 겹치며 구조화됐다. 출발점은 1차 세계대전 전후 팔레스타인 지역의 지위가 급격히 바뀐 과정에 있었다. 1차 세계대전 이전 팔레스타인은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다. 전쟁이 진행되며 영국은 오스만 제국을 약화시키기 위해 중동에서 다양한 세력과 접촉했고, 그 과정에서 서로 충돌할 수 있는 약속들이 동시에 등장했다.
1915~1916년 영국과 아랍 지도부 사이에 오간 후세인-맥마흔 서신은 전후 아랍의 독립을 지지한다는 취지로 해석돼 왔다. 그러나 약속의 적용 범위가 명확하지 않았고, 팔레스타인이 포함되는지 여부를 두고 이후 논쟁이 이어졌다. 1916년 영국과 프랑스는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비밀리에 맺고 전후 중동을 영향권으로 분할하는 구상을 세웠다. 이는 전후 질서가 ‘현지인의 자결’보다는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의해 설계됐다는 인상을 강화했다. 1917년 영국은 발포어 선언을 통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민족적 고향(national home)” 수립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동시에 기존 비유대인 공동체의 권리를 해치지 않겠다는 문구도 포함됐지만, 현실 정치에서는 두 목표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장치가 충분히 마련되지 않았다.
전쟁 이후 국제연맹 체제에서 영국은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를 맡았다(1920년 산레모 회의 결정, 1922년 위임통치 문서 확정으로 이어졌다). 이 시기 유럽의 반유대주의와 박해, 시오니즘 운동의 확산, 경제적 기회 등이 결합하며 유대인 이주가 증가했고, 토지 소유와 고용, 정치적 대표성, 치안 문제를 둘러싼 긴장이 커졌다. 1930년대에는 갈등이 대규모 폭력으로 분출했다. 1936~1939년 팔레스타인 아랍 사회의 총파업과 봉기가 이어졌고, 영국은 진압과 제도 개편을 병행했지만 장기적 합의를 만들지는 못했다. 2차 세계대전이 다가오며 영국의 정책은 이주 제한과 통제 강화로도 움직였고, 양측 불만은 더 커졌다. 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는 유럽 유대인에게 안전한 피난처와 국가의 필요성을 절박하게 만들었다. 전후 난민 문제까지 겹치며 팔레스타인 문제는 영국의 통치 역량을 넘어서는 국제적 의제가 됐고, 영국은 결국 문제를 유엔으로 넘기는 방향을 택했다.
1947년 유엔 총회는 팔레스타인을 유대 국가와 아랍 국가로 분할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유엔 총회 결의 181호). 분할안 채택 이후 지역 내 충돌이 급격히 격화됐고,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하자 주변 아랍 국가들이 개입하면서 1차 중동전쟁이 벌어졌다. 전쟁 과정에서 팔레스타인 아랍인의 대규모 이주와 난민화가 발생했고, 난민 문제는 이후 분쟁의 핵심 쟁점으로 고착됐다. 이후에도 전쟁과 점령, 협상과 결렬이 반복됐다. 1967년 3차 중동전쟁 이후 이스라엘은 서안지구와 가자지구, 동예루살렘을 점령했고, 점령지의 지위와 정착촌 문제는 갈등을 장기화시키는 요인이 됐다. 1990년대 오슬로 협정은 상호 인정과 단계적 자치라는 틀을 제시했지만, 최종 지위(예루살렘, 난민, 국경, 정착촌, 안전보장)를 둘러싼 합의에 이르지 못했고 폭력과 정치적 분열이 이어졌다. 결국 분쟁의 기원은 한 시점의 단일 사건이 아니라, 1차 세계대전 전후에 겹쳐진 상충하는 약속과 식민 통치 구조, 민족주의의 충돌, 전쟁이 만든 난민과 영토 문제의 누적에 있었다. 그 누적된 구조가 오늘날까지도 해소되지 못한 채 분쟁을 반복시키는 조건으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2023년 10월 7일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상대로 선전포고 없이 대규모 침공 공격을 감행하며 새로운 전쟁이 발발했다.
입력: 2019.06.06 17:30
수정: 2026.01.01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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